마음에 품고 있는 여자에게 말 한 번 제대로 붙여보지 못한 채 바람둥이 친구에게 여자를 빼앗기고 분노하던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강수, 속물의 전형을 보여준 <바람난 가족>의 바람난 속물 변호사 영작, 비열하고 비굴하기 짝이 없던 <달콤한 인생>의 백사장, 사랑에 목숨 건 <너는 내 운명>의 순박한 농촌청년 석중, 강간범을 특히 싫어하는, 말투는 거칠지만 사랑에는 서툰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형사 두철, 그리고 <사생결단>의 도살견 같은 도 경장.
매 작품, 역할마다 무서운 몰입으로 완벽한 인물 표현을 해온 황정민이 이번에는 동명 일본소설을 영화화한 <검은집>에서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는 ‘싸이코패스’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보험사정인 ‘전준오’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황정민은 ‘역시 황정민’이라는 찬사가 터져나올 만큼 갓 입사해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이던 준오가 싸이코패스와 정면대결하기까지 겪는 과정을, 그 심경의 변화와 감정의 결을 잘 살려냈다.
황정민을 인터뷰하고 내린 결론은, 역시 배우 황정민은 대한민국이 신뢰하는 대표적인 배우라는 것이다. 황정민이 나오면 그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다. <검은집>만 봐도 그렇다. 생소한 소재가 주는 호기심, 그 이상의 관심을 끌어낸 건 배우 황정민의 힘이다. 이번에 <검은집>으로 4연속 흥행 안타를 칠까 아닐까,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황정민 앞에서 그건 큰 의미가 없다. 그는 연기가 좋아서 연기를 할 뿐인 천상 배우, ‘그냥 배우’니까.
<검은집>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소감이 어떠신지?
이제는 뭐 열심히 했으니까 관객 분들 기다리는 게 최우선인데, 기다리는 순간이 배우로서는 최고의 공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뭐…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들어요.
<검은집>은 ‘사이코패스’라는 생소한 소재를 다뤄서 관객들의 기대가 높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객들은 ‘황정민이 선택한 최초의 공포스릴러’라고 해서, 황정민이라는 네임밸류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을 텐데 그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 않나요?
부담감…. 모르겠어요. 작품에 대한 부담감은 늘 있었고, 작품 할 때마다 느끼는 거니까. 그건 아마 직업이 평생 배우인 이상(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늘 가져야 하는 숙제인 것 같고.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했다, 뭐 이런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는 것 같아요. 매 작품 처음 하는 거죠, 뭐.
안 그래도 주목을 받는 작품인데 관객들은 황정민 주연이다, 황정민 주연의 신선한 소재를 다룬 그런 공포스릴러다, 그래서 더 기대를 할 것 같거든요.
그렇죠. 그런 기대는 사실…인 것 같은데. 저는 기분이 좋아요. 왜냐면 어쨌든 그런 식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첫 시작부터 기분이 좋은 거잖아요. 근데 더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 부담감…? 그게 부담감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해요. 왜냐면 지금 시점에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이 전혀 없어요. 배우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끝났어요. 더 담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아닌지라 그냥 그런가 보다, 그러는 것 같아요.
낙천적인 것 같아요.
음… 낙천적인 것 플러스 구분을 좀 지으려고 하는 게 있어요. 그니까 배우의 몫이 있는 거고, 그걸 바라보는 관객들의 몫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건 철저하게 구분 지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원작소설을 몇 년 전에 우연히 사서 읽으셨다던데, 영화와 비교했을 때 영화가 특히 잘 표현한 부분이 있다면?
글로 쓰여져 있는 느낌하고 형상화 되었을 때, 물론 글로 읽을 때는 독자마다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영화화했을 때는 그 공통분모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거라 대단히 힘들고 부담감을 가지고 시작했어요. 그게 맹점이라면 맹점인 건데 어쨌든 이게 일본소설인 거고 한국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한국사람의 냄새를 풍길 수 있는 느낌이 분명히 있는 거니까, 그런 부분이 소설이랑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고, 또 하나는 글로 오는 색깔이나 색감이나 그런 느낌들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거. 그 다음에 배우들의 연기나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거. 어떻게 연기를 할까? 뭐 그런 거.
원작이 따로 있는 영화는 대부분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잖아요. 그리고 ‘원작이 더 낫다’고들 많이 해요. 그 굴레를 잘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번에 황정민 씨 같은 경우 의도해서가 아니라 그냥 몇 년 전에 봤던 소설인데 내용이 좋았고, 그래서 이번에 이 작품을 하겠다고 결정하신 거고, 또 영화 하면서 원작을 다시 읽어보셨을 것 같고, 그리고 영화가 나와서 영화도 몇 번 보셨을 것 같고, 그래서 질문 드린 거에요. 정확하게 짚어내실 것 같아서.
그게…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제가 그런 생각을 하니까 연기하는 데 있어서 자꾸 갇혀요. 그게 자꾸 벽을 만들어요, 오히려. 그래서 이런 생각을 자꾸 하면 안되겠구나 싶어서… ‘내가 차라리 이 책을 안 보고 했으면 좀더 편했을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자꾸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이런 생각도 들고. 그래서 좀 벗어나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다른 일이고, 별개의 문제일 수 있거든요. 근데 그 모든 개인이 읽었던 느낌이나 감정을 한 편의 영화로 다 충족시킬 수는 없다고 봐요. 그 나름대로의 느낌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저도 그러지 말자, 그러지 말자, 라고 스스로 많이 자제했던 것 같아요.
사실 남의 인생을 대변해서 보여준다는 건 늘 마찬가지겠지만, 이번 캐릭터는 특히 더 표현하기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촬영하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생도 많았을 것 같고.
육체적으로 힘든 거야 뭐, 누구나 다 그런 거니까. 저만 그러겠어요? 다들 몇 시간 못 자고 고생하는데. 근데 단지 제가 조금 힘들다고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두려움, 공포에 대한 감정을 끄집어낼 때. 보통사람, 저도 보통사람인데, 그런 부분에 대해 다 피하잖아요. 그런 공포를 안 느끼려고 하고.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충분히 와 닿아야 하는데, 예를 들어 사랑의 감정은 늘 주변에서 얘기 듣고, 느끼고, 또 마음 한구석에 다 뭔가 하나 있잖아요. 근데 이건 공포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이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저도 질문 드리고 싶었던 게, 일반적으로 힘든 부분은 배제를 하고 그런 종류의 공포를 느낀다는 게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고는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실제로 사이코패스를 주변에서 보신 적은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어떤 점에 주안점을 두고 표현하셨는지를 묻고 싶었어요.
가장 주안점을 둔 건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준오의 느낌처럼, 준오가 당하고 불안해하고 그런 것들을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저도 공포영화나 스릴러물을 보면서 손에 땀을 쥐고 주인공이 죽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저걸 헤쳐 나가지? 이러면서 같이 간단 말이죠. 저도 관객일 때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까 분명히 제가 하는 입장에서도 그런 느낌을 줘야 한다, 관객의 느낌도 같이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촬영 중일 때는 같이 가고 있는 건지를 모르잖아요? ‘정말 내가 관객들과 같이 가고 있나? 아니면 나 혼자 앞서가나? 그것도 아니면 관객들은 저만치 가고 있는데 내가 느리게 가고 있나?’ 이런 것들. 그것이 많이 힘들었어요.
소설은 글로 표현되어 있으니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면 우리가 알 수 있잖아요. 이미지가 있으니까. 그런데 그걸 표현해야 하는 거니까, 그게 힘든 것 같아요. 차라리 자막으로 ‘소스라치게 놀라는 준오’라고 써주면 얼마나 좋겠어요.(웃음) 그런 것들. 그래서 아마 더 어려운 게 아니었나… 예.
사이코패스에 대해 따로 공부하셨다던데?
네, 제가 뭘 알아야 하니까 자료들을 많이 찾아봤죠. 논문이나 책, 정신분석학에 나와있는 사이코패스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또 왜 갑자기 사이코패스라는 단어가 요즘에 느닷없이 출현할까? 하는. 이 소설도 그냥 갑자기 쓰여진 건 아닐 거란 말이죠. 분명히 사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고 그래서 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반향을 일으킨 것 텐데 그 동기가 무엇일까? 왜 굳이 이 소설을 영화화해서 우리나라에 보여줄까? 그런 것들을 좀 알고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해서.
영화 속에서 전준오는 사이코패스도 결국은 인간이라고 결론을 내리는데, 사이코패스에 대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황정민 씨는 사이코패스를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쨌든 그들도 인간인 거잖아요. 물론 저한테 직접적인 행동을 가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준오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왜 손을 잡아줘?’ 저는 ‘아 이게 잡아줄 수 있어?’ 하고 반문하고 스탭들한테도 “잡아주겠니? 잡아줄 것 같아?” 하고 물었어요. 다 안 잡아줄 것 같대요. 저도 안 잡아줄 것 같거든요? 하지만 전준오는 잡아줘요. 그렇게 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그게 뭐 전준오라는 사람이 대변인은 아니지만 그를 통해서 누구나 잡아줄 수 있는 마음은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에요. 그게 사람이잖아요. 그러기 힘들지만….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그래서 사람인 거고, 그러지 못해서도 사람인 거에요.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사람이다, 라는 걸 보여주고 싶기 때문에 분명히 잡아줄 수 있는 거고, 동기가 생기는 거에요.
인간으로서 잡느냐 아니냐, 이분법화 되어 있지만 그게 영화적으로 재미 있나 없나를 떠나서 저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 관계라는 게 사회에서 그나마 힘들 때 옆에 앉아줄 수 있고 다독여줄 수 있고 얘기 들어줄 수 있고, 이런 것 때문에 그나마 살만한 건데, 그게 없으면 우리가 살 이유가 없는 거 아니에요. 뭐 보이기에 생각은 평범하고 재미 없다고 할지언정 그게 핵심 있는 것 같고 제일 중요한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전준오라는 인물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도 일반인으로서는 전준오의 마지막 행동은 공감을 얻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고문을 당한 적이 있는데,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가해자를 보면서 연민이 느껴지더래요. ‘저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한 거죠. 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충분히 공감이 돼요. 얕게 생각하면 순간 뭐 저런 게, 이렇게 생각하게 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거든요. 그게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극중에서 “사이코패스와 사이코는 다르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영화가 그 차이점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시죠?
저는 내심 걱정되는 게, 사이코패스라는 질환을 앓는 모든 사람이 살인자는 아니거든요? 누구나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이고, 누구나 앓을 수 있는 병이거든요. 다만 영화라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보여준 거죠. 저도 가질 수 있는 거에요. 누구나 기질을 가지고는 있거든요. 상대방을 힘들게 하면서, 그걸 알면서도 굉장히 냉정해질 때 있잖아요?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후회스럽고 ‘내가 왜 그랬지? 그러지 말걸’, 하는 식으로 늘 후회하고 반성하게 되잖아요. 그런 건데, 저는 영화에서 사이코패스를 너무 극단적으로만 표현이 된 것 같아서 걱정은 있지만, 영화에서 사이코패스를 나름, 대단히 잘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심리적 공포가 포인트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시각적인 면 때문에 심리적 공포가 약간 희석될 수도 있는데?
맞아요. 저도 하면서도 너무 가지 않느냐, 너무 그런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심리적인 느낌도 충분히 줘야 하지만 시각적으로도 보여줘야 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 우리가 열고 가자, 이렇게 얘기하고 결론을 내렸죠.
감독님과의 작업이 어땠는지?
재미있었어요. 감독님, 저, 촬영감독, 조명감독, PD 다 모여서 같이 얘기하고. 한 배를 탄 사람들이니까 힘든 거 있으면 서로 나누려 했고, 늘 얘기를 했어요. 질릴 정도로.
유명한 밥상 멘트 이후 달라진 게 있는지? 또 그게 많이 패러디 되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달라질 게 뭐 있나요. 늘 똑같아요. 제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 그래야 상대방도 마음을 여는 거니까요. 패러디 되는 거야 당연히 기분 좋은 일이죠. 그 말을 다른 분들이 할 수 있는 건 제 뜻을 이해하고 공감했으니까 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요.
늘 느끼는 거지만, 모든 질문에 답변을 정성스럽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럼요. 어쨌든 저희 영화 때문에 저 만나겠다고 오신 건데 대단히 정성스럽게 해야 하는 거죠. 그건 당연한 거죠. 우리가 이렇게 선물을 만들어 놨으니 잘 풀어보십시오, 하고 관객들한테 드리는 거니까 최선을 다하는 게 당연한 거죠.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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