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작(多作)으로 유명한 작곡가 바흐는 1000여 곡이 넘는 작품마다 동일하게 빛나는 천재성을 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는 ‘음악 제조 공장’ 같은 것이 있을 때나 가능할 법한 속도로 명작들을 만들어 내면서도, 평소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피조물로서의 겸손함을 잊지 않는 자연인이었다. 천재 음악가의 기벽도 없었다. 숨길 수 없는 재능이 발산하는 무시무시한 아우라 대신 겸허한 눈빛과 아이들을 보듬는 따뜻한 손을 가진 사람. 인터뷰를 위해 황정민을 마주 대했을 때 그에게서 스크린 속의 모습을 더듬어 찾는 일은 진작부터 포기했어야 했다. 거기엔 “촬영 없을 땐 아무 것도 아니다”라 말하는 자연인 황정민이 있었을 뿐.
글_유지현 기자(prodigy@heraldm.com) 사진_김명섭 헤럴드경제 기자(msiron@heraldm.com)여자 정혜,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 사생 결단, 바람난 가족…. 그의 출연작을 주욱 떠올리며 황정민을 마주하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관객들이 배우 황정민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호감을 살짝만 언급해도 “아유, 참, 그게…” 하면서 멋쩍어하고, 선생님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모범생처럼 가지런히 앉아 기자의 질문에 귀기울이는 모습이며, 미간을 찌푸려 신중히 생각하며 더듬더듬 말하는 대답까지. 투박한 그의 모습은 ‘그의 저 너머 어디에서 그런 연기가 나오는 걸까?’ 하고 의아하게 만든다. 그 유명한 ‘밥상 수상 소감’을 말할 때 어쩔 줄 몰라 벅차 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쉽게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그날만 벌써 네 번째 인터뷰였지만 그는 지친 기색 없이 기쁘게 맞아 줬다. 배우의 아우라가 빠져 있는 자리에 겸손함과 따뜻함이 차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 빼고는 그 무엇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배우의 모습이 실체를 드러냈다. 뒤늦게 나타나 상대방을 압도한 그 녀석이 바로 배우 황정민의 진짜 아우라였다.
신작 ‘검은집’으로 돌아온 황정민은 작품에 대한 부담이나 아쉬움은 없다고 했다. 한국판 ‘양들의 침묵’을 노렸다 할 만큼 소름 끼치는 스릴러 영화를 끝낸 배우치고는 너무 담백하고 평온해 보였다. 해가 어둑어둑 지고 바흐의 규칙적인 선율이 낮게 깔린 가운데 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너는 내 운명’ 때에 비해 20kg쯤 몸무게를 줄인 그의 야윈 얼굴 위로 그림자가 져서 어둡게 보였다. 그 즈음 왠지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_버지니아 공대 사건 이후로 반사회적인 정신질환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죠. <검은집>의 소재가 ‘사이코패스’라서 영화에 대해 더 궁금했어요.
“그런 끔찍한 사건이 다시 일어나면 안 돼요. 그런데 참 무서운 것이, 그런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들은 상대방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지 못해요. 남을 죽이는 것도, 그만큼 자신을 해치는 것도 쉽게 생각하죠. 사이코는 별 의도 없이 사람을 죽이지만, 사이코패스는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되는지 알고 계획 하에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차이에요.”_그럼, 사이코패스가 저지르는 범죄의 질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요?“그렇죠.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사이코패스는 질병이거든요. 병을 앓고 싶어서 앓는 사람은 없잖아요. 사람들은 쉽게 그런 이들을 ‘괴물’로 치부하지만, 어떤 차원에서는 연민이 느껴지기도 해요. 영화는 살인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남에게 피해나 고통을 주고도 냉정해질 때가 있잖아요. 넓은 의미에서는 일맥상통하지 않나요?”_사이코패스가 질병이라면, 어떤 처방이 내려질 수 있을까요?
“사실 확실한 치료방법은 없다고 하네요. 정신적인 문제가 발견됐을 때 격리시키는 수밖에는. 답답한 거죠. 문명은 너무도 편리하게 발전하는데 사람들 사이의 관계,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적고 시원한 대책도 없잖아요. 영화 찍으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_일본 작가 유스케의 원작 소설을 먼저 읽으셨죠? 그때도 특별한 느낌을 받으셨나요?“어릴 때는 소설을 좋아했는데 나이 먹고 나서는 수필집을 주로 읽어요. 그런데 2년 전쯤 우연히 <검은집>이란 수상한 제목의 소설을 사게 된 거예요. 집 근처 호수 벤치에 앉아 하루만에 다 읽었어요. 덕분에 영화 제의가 왔을 때 ‘어디서 봤는데…’ 하고 아는 척을 할 수 있었죠.
일본에서는 크게 히트한 작품이에요. 원작자가 보험사에 근무했던 사람이라고 하니, 분명 그런 소설이 나오게 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이 없는 살인이 많이 일어나잖아요. 돈이 인간성보다 앞서고, 정신문제는 뒷전인 사회분위기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죠.”_영화에서 사이코패스의 범죄를 파헤치는 보험사 직원으로 등장하시잖아요. 캐릭터의 어떤 면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셨나요?“사실 저에게 캐릭터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대본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가 중요하죠.
내가 그 대본을 읽고, 이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겠다 싶으면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엔 관객들과 어떻게 공감을 형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거죠.”_<검은집>은 스릴러 영화죠. 관객들에게 ‘공포’를 전달하기 위해 캐릭터를 만들어 가셨을 텐데, 다른 영화 작업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스스로 만들어 가는 캐릭터가 아니라 공포에 반응하는 캐릭터가 되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참 어려웠어요. 스릴러 장르에 대해 더 공부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멜로 드라마의 경우는 딱 하나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면 되는데, 스릴러는 공포를 느끼는 매순간이 정점이잖아요. 관객들과 공감대가 형성되어 두려움도 옥죄임도 함께 느껴야 하는데, 거기에는 테크닉적인 요소가 필요했어요. 그게 참 어려웠죠. 작업하면서 ‘관객들이 같이 놀라고 있을까?’ 하는 부담감이 가장 크게 느껴졌어요. 여름 시즌에 나오는 공포영화들 보면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는데, 그렇게 비난하던 손가락이 구부러져요. 민망스럽더라고요. 야, 이게 쉬운 게 아니구나.(웃음)”
_작업하시면서 ‘아, 이 공포가 전달되고 있구나’를 어떻게 확인하셨어요? 감독님이나 스태프들의 반응이 참고가 되시나요?“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 식구들은 며칠만 지나면 다 잘한다고 해요.(웃음) 늘 거리를 두고 한 발짝 물러나 새롭게 봐 줘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죠. 그냥 뭣보다 저는 모든 장면에서 ‘그런 척’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어요. 정말 마음이 동해서, 정말 무서워서 놀라고 두려워했죠. 그런 진정성이 받아들여지면 참 좋겠는데, 관객들이 어떻게 봐주실지는 모르겠어요.”
_배우 황정민에 대해 관객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대감이 큰 것 같아요. 연기력이라든가, ‘황정민이 출연한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는 되겠다’ 하는 기대감이요. 부담이 되진 않으세요?“<검은집>을 찍는 동안 정말 토할 정도로 영화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했어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을 거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라는 배우에 대한 기대나 영화에 대한 평은 이제 제 몫이 아니에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면 제 역량이 안 되는 것이고, 그걸 받아들이고 다음에 더 잘하는 것이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_영화는 늘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주잖아요. 상실감을 위로해 주기도 하고, 잊고 있던 마음을 찾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고통을 느끼게도 하고요. <검은집>은 관객들에게 무엇을 주는 영화인가요?“스릴러 영화니까 보시면서 ‘무서워, 찝찝해’ 하고 느끼시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두려움을 통해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란 뭔가를 생각하게 해줘요. 함께 얘기하고 손 잡아 주고 공감하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고, 그나마 그것 때문에 살아가잖아요. ‘나는 어떻게 삶을 대해야 하나’를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으실 거예요. 관객들 개개인이 다르게 느끼시겠지만요.”
_‘너는 내 운명’으로 청룡영화제에서 상 받으실 때 전도연 씨께 각별한 찬사를 보내셨잖아요. 이번에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받는 것 보시고 직접 축하인사 전하셨나요?“사실 뭐 그런 얘기 뻘쭘해서 잘 못해요.(웃음) 만약 기자님이 기사를 너무 잘 쓰셨는데 동료들이 막 칭찬해주면 안 그러겠어요? 똑같아요.(웃음) 저는 연극을 하다가 영화를 늦게 시작했고, 도연이는 이미 최고의 스타였어요. 그땐 그 친구와 함께 작업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죠. 그런데 함께 작업하면서 대단히 좋은 느낌을 받았어요. 석중이란 역할에 빠져서 연기할 수 있었던 건 배우 전도연 때문이에요. 도연이만이 가지는 아우라가 분명히 있었기에 석중이 진실되게 보였던 거죠.”
_어느 인터뷰에서 전도연 씨가 배우 황정민을 ‘뭔가 감추고 있는데, 그게 호랑이 발톱 정도라 할 수 있겠다’고 표현하셨더라고요. 황정민이 말하는 배우 전도연은 어떤가요?“현장에서 함께 작업하면서 느꼈던 건 참 집중력이 강한 배우라는 것이었어요. 칸 영화제에서도 그 배우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인정해준 거잖아요. 전도연은 다른 생각을 하는 상대방을 ‘아차’ 싶게 만드는 배우예요.”_연극을 오랫동안 하셨잖아요. 그 시간이 어떤 의미로 남았나요?“연기의 모든 것, 배우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연극 무대에서 다 배웠죠. 가장 고마운 건, 배우는 무대 위에 서 있을 때에만 존재감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배우로서의 직업의식이라 할 수도 있겠네요. 저에 대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지만 촬영이 없는 날 저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빈둥대는 자연인일 뿐이에요. 배우는 연기로만 말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곳이 연극 무대예요.”
_이전부터 독립영화나 단편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하셨죠. 이제 시나리오를 골라서 출연하실 수 있는 인기배우 반열에 오르셨는데, 아직도 그 생각엔 변함 없으신가요?“아유, 제가 무슨 인기배우예요. 그리고 큰 영화, 작은 영화는 따로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직업이 배우잖아요. 스스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양한 것을 관객들에게 보여 드려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는 공연물이 다양하지 않죠.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 가면 볼 거리가 굉장히 많아요. 뛰어난 역량을 지닌 사람들이 왜 모두 한 가지만 하나, 아쉬움이 있어요. 조금씩 관객들의 선택 폭을 넓혀 나가고 싶어요.”
_미개봉작인 허준호 감독님의 <행복>은 어떤 계기로 출연하셨어요?“허준호 감독님과 함께 작업해 보고 싶었어요. 그분의 영화 느낌은 상당히 차분하지만 인물들은 매우 현실적이죠. 저는 그렇게 현실적인 인물을 좋아해요. 그런데 허 감독님의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은 다 비슷해요. ‘배우가 다른데 왜 느낌이 비슷할까?’ 항상 의아했죠. 내가 하면 좀 달라질까 궁금해서 했어요.(웃음)
_사람들이 어떤 배우에 대해 호불호를 느낄 때는, 연기도 연기지만 사람 됨됨이가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비록 개인적으로 대면할 수는 없지만, 얇은 스크린을 통해서도 저 배우가 겸손하게 노력하고 있는지, 연기에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를 민감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진정성이 담긴 배우’라는 크레딧을 얻은 소감이 어떠신가요?
“참, 그게… 그렇게 봐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말씀하셨다시피 배우가 진정성을 가지고 연기하는지 관객들은 100% 아세요. 절대 속일 수 없죠. 제가 자주 하는 얘기 중에 ‘1억 원짜리 땅 파는 기계로 땅을 파 봐라, 7000원이 나오나’ 하는 말이 있어요. 어떤 영화를 선택해 티켓값을 지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배우로서는 너무 고마운 일이죠. 그러니 어떻게 대충합니까? 계속 연구하고 노력하고 검증해도 모자라요. 저는 한 번에 오케이 나는 장면도 고집해서 여러 번 찍어 봐요. 관객들에게 적어도 티켓값이 아깝다는 생각을 안겨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게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인 것 같아요.”<헤럴드경제 자매지 캠퍼스헤럴드(www.camhe.co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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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2&aid=000007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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