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양에 관한 오해 몇가지
1. 박신양은 말을 잘할 것이다
지적인 인상에 러시아 셰프킨대학과 슈킨대학에서 유학생활까지 한 학구파 배우 박신양.
예리한 인상처럼 말도 잘 할 거라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어눌한 말솜씨다. 거기다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그를 인터뷰하는 기자들은 진땀을 빼기 일쑤다. 실컷 머리를 짜내 질문을 던져도 그로부터 속시원한 대답을 듣기는 힘들다. “네” “아니오” “그렇죠, 뭐” 정도가 대답의 절반을 넘으니,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밖에. 그러나 정작 그의 내면은 복잡하고 깊다. 그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말들은 짧지만 아름답고 철학적이다. 잔뜩 인상을 쓰고 “어, 그러니까 그게…” 하면서 적절한 말을 찾으려 애쓰는 그를 보면 그가 얼마나 난해한 속내를 가진 남자인지 알 수 있다.
2. 박신양은 운동을 못할 것이다
안경을 쓴 마른 몸매의 그를 보면 운동과는 거리가 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도 ‘강한’ 남자다. 박신양이 태권도 고단자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작년에 영화 <편지>를 통해 죽어가는 뇌종양 환자역을 실감나게 연기했던 그는 새 영화 <약속>을 통해 그동안 감춰뒀던 자신의 신체적인 연기력을 마음껏 펼쳐보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다. 암흑가 조직의 보스역을 맡은 박신양의 액션연기가 이 영화의 색다른 볼거리가 될 거라고 영화사 신씨네 홍보팀도 입을 모은다. 메가폰을 잡은 김유진 감독의 평. “야, 최민수보다 낫다.” 영화가 개봉되면 헬스와 수영으로 다져진 그의 근육질 몸매를 볼 수 있을 듯.
3. 박신양은 조용한 사람이다
혼자 있길 좋아하고, 두꺼운 철학책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낼 것 같은 사람?
홍대앞 록카페에서 한 번이라도 그를 본 사람이라면 이런 말 못한다. 박신양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화려한 춤솜씨로 무대를 장악하는 ‘가무파’로 알려져 있다. 록카페 출입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서른살의 나이가 그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바지에 야구모자를 눌러 쓴 그는 어린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말의 제재도 받지 않고 당당히(?) 들어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신나게 몸을 흔드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재밌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썰렁하긴 하지만 농담도 곧잘 던진다.
4. 박신양은 여자에게 마냥 잘해줄 것이다
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봐온 그의 모습은 늘 그랬다. ‘착한 나라’에 사는 왕자처럼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한없이 부드럽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 심지어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혼자 남을 그녀를 위로하는 데만 온 정신이 가 있는 남자. 여자라면 누구나 이런 남자를 애인이나 남편삼고 싶은 꿈을 꾸었을 것이고, 그래서 박신양은 여대생들이 뽑은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위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역할에 적격인 배우’로 인식되고 있는 박신양은 영화 속 분신들의 사랑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는눈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기본이지만, 죽어서까지 편지를 남기는 환유의 모습(<편지>)은 좀 소심해보인다. 어차피 떠나야 할 거라면 냉정하게 ‘나를 잊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결혼관을 밝히는 대목에서 의외로 보수적인 면도 엿보인다. “저랑 결혼하는 여자는 할 일이 하도 많아서 아마 바깥일 하기 힘들 거예요. 결혼하면 아침저녁으로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 먹고, 아내가 골라주는 옷 입고 외출하고 싶거든요. 아이도 엄마 품에서 충분히 사랑받으며 커야 한다고 생각해요. 함께 여행도 하고, 놀 때도 같이 놀고… 그러려면 아내가 너무 바쁘면 안되잖아요. 말하자면 살림을 직업처럼 프로답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좋은데, 아마 찾아보면 있겠죠?”
난생 처음 깡패 연기 하면서 악몽에 시달려 박신양의 연기를 두고 한 평론가는 “카메라 앞에서 피터지는 연기를 한다”고 말했다. 어딘지 좀 어눌하고 말수도 적은 그이지만, 카메라가 돌아가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펼쳐낸다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박중훈, 최민수, 한석규의 뒤를 이어 한국 영화계를 주도해갈 톱스타로 꼽히는 데 주저함이 없는 박신양은 지난해 전국 2백만 관객을 울렸던 영화 <편지>로 선배 연기자 한석규와 함께 현재 기획되고 있는 멜로물의 캐스팅 0순위에 올라있다. 데뷔 3년차에 불과하지만 배우 기근에 허덕이는 한국영화계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편지>의 성공 이후, 밀려드는 영화 시나리오 속에서 그가 선택한 작품은 김유진 감독의 <약속>. 현재 후반작업중인 이 작품은 11월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깡패와 여의사의 운명적인 사랑을 담은 멜로드라마인 이 영화에서 박신양은 날카롭고 강한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한편으로 순수하고 여린 감성을 소유한 조직의 보스 공상두 역을 맡았다. 부드럽고 착한 남자로 인식되어온 그가 펼쳐보일 깡패연기는 어떨까.
“솔직히 걱정 많이 했어요. 깡패 연기가 자신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변신한 제 모습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에서였죠. 4개월간 사람을 때리고, 협박하고, 죽이는 나쁜 놈을 연기하느라 악몽에도 시달렸습니다.”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철저하게 작품 속 인물을 내면화해 그 인물로 살아가는 박신양은 그동안 촬영장에서뿐만 아니라 카메라를 벗어난 곳에서도 깡패 공상두로 살고, 생각하고, 느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공상두가 잔인하게 정적을 제거하는 장면을 촬영한 날에는 무시무시한 귀신꿈을 꾸고 가위에 눌려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저에겐 좋은 변신의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면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흥미롭죠. 도덕적인 기준으로 보면 나쁜 놈이지만, 전 공상두 역시 용서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그려지길 원했어요. 모차르트와 그를 시기해 죽음으로 몰고 간 살리에르가 결국엔 모두 신에 의해 구원받았던 것처럼요. <편지>의 환유와 마찬가지로 공상두 역시 본질은 사랑이에요. 그 역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한 한 인간인 거죠.”
그의 상대역인 외과 레지던트 채희주역은 <접속>으로 화제를 모은 전도연이 맡았다. 두사람은 이 영화로 처음 만나 호흡을 맞췄다. 멜로 연기를 하는 데 있어 상대 여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박신양. 연기를 하는 동안에는 정말 사랑하는 느낌으로 상대를 대하고 하루종일 그 사람을 생각한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들뜬 행복감을 안고 촬영장으로 향했다고. 전작인 <접속>에서는 정작 한석규와 함께 등장하는 신이 거의 없어 얼굴도 몇번 보지 못했던 전도연은 두 번째 영화 <약속>을 통해 박신양과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받았다.
전도연은 4개월간 곁에서 지켜본 박신양에 대해 “여자보다 더 섬세한 연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잘 살리는 배우죠. 늘 진지하게 연구하는 모습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상대를 아주 편안하게 해줘서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나의 화두는 사랑, 사랑없는 삶은 곧 죽음이다
영화의 한 장면. 병원에서 환자와 의사로 처음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던 이들은 공상두가 퇴원 후 채희주를 찾아가 적극적인 구애를 하면서 첫 데이트를 시작한다. “오늘도 안 만나주면 망치로 무릎을 부서뜨려서 절름발이가 된 다음 당신이 있는 병원에 다시 입원하려고 했다”는 남자의 진담어린 농담을 들으며 파안대소하는 여자. 이들의 우중 데이트 장면에서 조직의 보스인 공상두의 뒤에는 보디가드 2명이 붙어 있다. 여자가 걸음을 멈추면 남자가 따라 멈추고, 뒤따르던 보디가드들도 걸음을 멈추고…. 여자가 말한다. “다음부터는 꼭 혼자 나오세요.” 결국 여자의 요청에 따라 둘만의 달콤한 데이트가 시작되는데…. 두사람의 사랑은 공상두의 살인으로 인해 결국 비극으로 치닫는다. 영화의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고 떠났던 공상두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다. 성당에서의 이별. 공상두가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장면에서 박신양의 리얼한 연기에 촬영장은 이내 숙연해졌다고.
그와 얘기를 하다보면 유독 ‘사랑’이라는 단어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사랑이란 평생 풀어가야 할 삶의 화두이고, 사랑없는 삶이란 곧 죽음이라고 그는 진지하게 말한다. 이 가을에 옆구리는 허전하고, 쓸쓸한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외로운 ‘솔로’이기 때문일까.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좀더 포괄적인 개념이죠. 세상에 대한 사랑, 사회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사랑… 이런 모든 사랑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되잖아요. 예전에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고, 어린 시절에 봤던 영화에 대한 기억과 사랑이 지금의 배우 박신양을 만들고 하는 것처럼요.”
평생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고 살겠다는 박신양은 그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 역시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고 극장을 나온 후에 그 감동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으로 이어져 조금씩이라도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 배우는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직업이라고. 그리고 배우는 모든 것을 다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연기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지만 그는 아직 만족을 모른다.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배우’라는 기준을 놓고 볼 때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콤플렉스가 많다고 말하는 박신양. 그래서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늘 처음처럼 감각의 날을 예민하게 세우고, 첫사랑의 설렘과 두려움으로 작품을 대하려고 한다.
“제가 원래 그리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에요. 늘어져 있는 거 좋아하고, 뭘 하나 선택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런데 러시아에 있을 때 추운 나라에서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 보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뭘 하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전 죽을 때 ‘아, 후회없이 한편생 잘 살았다’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순간순간 피터지게 열심히 살아야죠.”
기본 체력이 있다고는 하나 과격한 액션연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인터뷰 다음날 는 지방으로 혼자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일에 철저히 몰두했던 만큼, 철저한 휴식도 그에겐 필요하다.
‘사람에겐 누구나 스스로 건너야 할 자신만의 사막이 있는’ 거라고 영화 <편지>에서환유는 정인에게 말했다. 그에게도 그런 사막이 있다. 이제야 그 사막을 건너는 길을 찾은 것 같다고 조용히 말하는 그의 눈빛이 선연한 가을하늘을 닮았다.
[출처] <기사> 박신양에 관한 오해 몇가지 / 1998 |작성자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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