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EGOIST
박신양은 고집스럽다.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박신양은 민감하다. 낯선 사람이 있으면 이내 말을 멈춘다. 박신양은 분명하다.
원하지 않는 질문에는 입을 다물고 단 한 마디도 하려고 들지를 않는다. 그래서 다들 박신양을 까칠하다고 한다.
고집스럽고 민감하며 분명해서다. 하지만 그게 진짜 박신양이다.
덕분에 한동안 잘 나갔었다. 고맙다.
?
기주라는 이름이 한 때는 한기주 덕분에 상종가였다.
… 다들 유난히 그 이름을 기억하는 거 같다.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는 워낙 매력적이었으니까. 이런 질문 많이 받지 않나. 당신과 한기주가 닮았냐고 말이다.
다들 그 질문은 꼭 빼놓지 않고 하더라. 몇 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그런다. 나하고 한기주는 전혀 안 닮았다.
사실 그런 인물이 존재할 수나 있나. 여자들이 멋지다고 생각할만한 부분만 다 모아서 만들어진 거다.
욕망이란 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다. 욕망이란 건 욕망의 대상을 던져줄 때 생겨나는 거다.
한기주란 인물도 여성이 생각하는 욕망의 대상이지. 그래서 사기다.
사기까지는… 아니고… 극적인 판타지라고 했으면 좋겠다.
음… <범죄의 재구성>식으로 말하면 접시를 돌린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보단 판타지가 맞겠다. 어떤가.
그걸 배우 스스로 깨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나?
그걸 깨고 싶은 영화야 많지. 하지만 그 판타지를 깨는 게 영화나 드라마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드라마는 판타지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
거기서 창작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거 같다. 그 환상을 깨거나 그 환상을 부풀리거나 다. <파리의 연인>에서
마지막 장면의 선택은 좀 거칠었지. 다 거짓이다. 그랬으니까.
글쎄… 뭐라 할 말이 없다. 그저 내가 화나는 건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두고 두고 욕을 먹어야 하느냐는 거다.
누가 당신한테 뭐라고 하던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제대로 답도 못하고 늘 듣고 있어야 하는 처지 아닌가. 난 열심히 했거든.
그래서 <파리의 연인> 작가들하곤 왜 싸운 건가? 마지막 장면 때문에?
그게 잘 지냈거든. 매일 밥 사주고 그랬다. 멋있어요, 멋있어요 그러면서 따라다니고 그랬지.
드라마 찍는 내내 잘 지냈다. 그러다가 막판에 틀어진 거다. 드라마를 그렇게 끝내는 게 어디 있나.
뭐 나도 그걸 반대한 여러 사람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었지다.
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드라마의 주인공일 때는 얘기가 다르지.
속상하지. 온통 판타지를 위해서 내가 그렇게 열심히 했느냔 거지. 허리 부러져가면서?
좀 이상하긴 했다. 그 모든 게 다 꿈이었다는 거였는데, 생각하기에 따라선 너무 거창한 판타지를 만들어냈으니까
뒤늦게나마 양심선언을 했던 게 아닐까?
아니다. 그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런 의도가 그 사람들한테는 없었다.
그럼 그 장면은 뭔가?
나도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단지 그렇게 만들었으니 마지막까지 열심히 연기한 배우들은 뭐가 됐겠나.
다 가짜라고? 그렇게 안 해도 그게 판타지라는 것쯤은 보여줄 수 있다. 정말 지금 생각해봐도 그건 대학교적인 유치한 발상이었다.
어쨌든 <파리의 연인>은 당신에게도 중요한 작품이었던 거 아닌가. 사실 그 때까지 박신양의 인기는 떨어져가고 있다고 들 했다.
당신을 되살려놓은 작품이지.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아니.. 그러니까 뭐… 영화나 드라마나 어쩔 수 없이 혼자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자기 뜻대로 작품을 통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 나 혼자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아니란 말이다. 호흡이 맞아야지.
그렇구나.
<파리의 연인>도 그렇고 박광수 감독의 <눈부신 날에>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영역에 대해서까지 전적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게 이 작업인 거 같다. … 그래서 흥행할 작품이나 호흡이 맞는 작품은 따로 있는 거 같다. 어쨌든 <파리의 연인>은
훌륭한 기획이었다. 내 동생하고 동생 와이프한테 물어봤는데 그 때 딱 얘기만 듣고 재미있겠다고 그랬거든.
<쩐의 전쟁>? 그런 드라마를 한다면서?
그 얘긴 또 어디서 들었나?
인터넷 뉴스…
아직 결정 안 났다. 며칠 안에 결정 날 거다.
원래 인터넷엔 없는 게 없다. 당신 결혼 사진도 봤는걸?
그거야 결혼 사진 찍은 사진관에서 홍보용으로 인터넷에 올린 거고. .
어? 그럼 고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뭘… 그런 것까지 어떻게 다 신경 쓰고 사나. 사진도 잘 찍어줬는데…
<쩐의 전쟁>이란 드라마는 대뜸 봐도 <범죄의 재구성>에서의 당신 느낌이 생각나더라. 당신은 일찍부터 영화와 드라마를 오갔다.
그러다가 영화에서의 이미지와 드라마에서의 모습이 서로를 자기 복제하기 시작했던 듯 하다. <약속>이나 <편지>에서의 멜로
이미지가<파리의 연인> 같은 드라마에서 재등장하고, 다시 <범죄의 재구성> 같은 느낌이 드라마에서 나타나고 말이다.
안경 쓴 박신양과 안경 벗는 박신양이 있다고나 할까?
흠…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말을 해라. 말을 해야 녹음이 되지.
…
녹음을…
하지만 어느 배우가 자신의 작품 속 이미지를 그렇게까지 분석적으로 생각하며 살겠나.
작품이 재미있으면 하는 거다. 재미없으면… 난 절대 못한다.
<눈부신 날에>는 재미있었나?
재미없으면 못 한다니까. <눈부신 날에>도 그랬고 <범죄의 재구성>도 재미있었다.
최동훈 감독은 <프리미어>의 전종혁 기자 말로는 첫 작품부터 신인이라기보단 거장의 기운이 있었다더라. 준비된 감독 말이다.
맞다. 그런데 난 최동훈 감독 같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시작했을 때가 더 재미있을 거 같다.
응?
지금은 영화를 만드는 기본틀이 잘 갖춰진 상태에서 산업화된 영화를 찍고 있지만 그가 거기에서 자기 문제에
좀 더 깊이 빠져들면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하다. 하지만 최동훈 감독은 영화 시스템을 잘 아는 감독이다.
남의 돈 가지고 예술 하려는 욕심도 없고 배우나 스태프의 영역에 대한 배려도 뛰어나지.
배려?
감독만 창작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영화는 집단 창작이니까. 서로에 대한 매너가 필요하거든.
그런데 이 덕목이 무시되기 일쑤다. 상대방도 나만큼이나 창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린 존중하지 않는다.
누구만… 누구만 창작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모두가 머리를 뜨겁게 움직이고 있는데 그걸 확 결집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좋은 감독인 거다.
박광수 감독은 어땠나?
박광수 감독은 좀 거리가 있지. 그런데 이건 쓰지 마라. 우리, 더는 싸움 붙이지 마라.
1990년대는 분명 박광수 감독의 시대였다. 그의 영상 언어로 세상이 설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는 아니다.
아직 아닌지 앞으로도 아닐지는 모르지만, <눈부신 날에>를 보면서는 적어도 아직은 아니란 생각을 했다.
아무리 훌륭한 감독의 예술적인 재능도 시간을 거치면서 퇴락할 수도 있고 변화할 수밖에 없는 거 같다.
누구에게나 전성기란 게 있는 거다. 우리한테도 그건 사실이다.
이 양반… 나보다 더 심하게 얘기하네. 이 바게트 맛있네. 난 아침을 안 먹고 오니깐…
장가가면 아침밥은 늘 먹여주는 거 아닌가? 집에서 안 차려주나?
아닌데? 우리 집에선 아침은 알아서 먹는다.
집이 어딘가?
일산이다. 평소엔 늘 집에 있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한다. 사진도 찍고 그러지. 그냥… 다 궁금하다.
세상 여기저기 다니는 게 좋다. 잡지 만드는 것도 한번 봐야 하는데…
아니, 왜?
궁금하니까.
잡지 만드는 건 별 거 없다. 그저 밤만 새면 된다.
지금까지… 배우들을 많이 만나 봤나? 몇 명이나 인터뷰해봤나?
글쎄… 많다. 안 세 봤다.
좋겠다. 난 도대체가 아는 배우들이 없다. 친한 배우도 없고 말이다.
아, 얼마 전엔 송강호 씨를 만났다. 송강호 씨는 만나 본 적이 있나?
없다. 아니다. 있다. 딱 한 번. <파리의 연인>을 찍고 있는데 우연히 거리에서 만났다. 나한테 오더니 딱 그러더라. 신수가 훤하시네요.
…
…
그런데 왜 아는 배우가 없나? 싸이더스HQ만 해도 소속된 배우들이 군단 규모 아닌가. 거기서도 당신은 최고참이었다.
아… 지금은 싸이더스HQ가 아니지? 당신 회사가 있지 않나? 시너지 엔터테인먼트? 이제 CEO네?
뭐… CEO는 무슨…
싸이더스HQ의 정훈탁 대표와는 오래된 사이 아닌가?
지금도 좋은 친구다.
어쨌든 싸이더스HQ는 배우들끼리 모여서 운동회도 한다던데 왜 아는 배우가 없나.
내가 그렇게 편한 성격이 못 된다. 지나가면서 인사하는 정도로 안다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참… 불편한 성격이다.
불편한 성격은 아니고…(그 때 누군가 근처를 지나가자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낯선 사람이 있으면 갑자기 당황이 돼서…
… 하긴, 마찬가지다. 인터뷰를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안다고도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지나면서 인사하는 것보단 나은 거 아닌가. 난… 유지태란 배우를 꼭 만나보고 싶다.
왜?
그냥… 그 배우가 궁금하다. 그가 생각하거나 말하는 게 궁금하더라. 그러고 보니… 당신, 유지태와 좀 닮은 거 같기도 하다.
응? 아… 안 그래도 유지태 씨하고 만났을 때 우스개 소리로 그런 얘기 가끔 듣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자기 닮아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사는 거면 다행이라고 그러더라.
역시… 그래서 난 그 배우가 궁금하다. 류승범이란 배우도 궁금하다. 만나보고 싶다. 류승범이란 배우는 술을 마셔도 멋진 거 같다.
배우란 직업은 어쨌든 멋진 거 아닌가. 남들이 술 마시고 다니면 주정이지만 배우는 고뇌가 되거든.
그렇지만 말이다. 나도 이거를 직업으로 선택한 게 아니다. 직업이 아니다. 배우는. 그 누가 앞으로 10년 동안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겠나.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흐름을 따르게 되지. 진짜로 목숨 걸고 해야 하는 게 배우다.
직업 선택의 차원이 아니란 거다.
그렇다면 당신이 배우를 한 건 숙명 같은 건가? 배우가 직업 이상의 무엇이란 얘기 아닌가.
젊은 시절엔 러시아로 유학을 떠날 정도였으니까 대단한 열정이 있었던 거 같다.
근데 그게 또 재미나다. 러시아 유학은 배우로서의 열정 탓이라기 보단 그냥 궁금해서 였다.
응?
내가 동국대학교를 나왔다. 그 때 졸업생들은 모두 다 방송국 공채 시험을 봤다. 유행처럼 말이지.
그런데 학교에선 선배들이 그런 공채 시험은 못 가게 했다. 예술가의 길이 아니란 거였다. 하지만 다들 하는데 나도 해야 할 거 아닌가.
그런데 똑 떨어졌다.
왜?
사실… 음… 가로 열고… 나 말고 그 자리엔 붙일 내정자가 있었던 거지. 가로 닫고.
아아…
그 다음부턴 여의도만 다고 싫은 거다. 마포대교만 건너도 가슴이 떨려 가지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잘 된 거다. 고민이 뚜렷해졌거든.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나,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고민을 죽으라고 한 거지. 어우… 그런데 결론은 더 배워야 한다는 거였다. 답은 딱 그거 하나였다. 그런 어디 가서 배우지?
그게 러시아?
아니지. 아니지. 일단 답은 대학원이었다. 그래서 세 달 동안 밤새 가지고 공부해서 대학원에 붙었다. 그때 친구 두 놈하고 같이 공부를 했는데 근데 그 둘은 떨어지고 나만 붙었네. 다 같이 대학원가서 함께 공부하기로 한 녀석들이었거든. 그래서 대학원 가 봐야 소용없게 된 거야. 학비도 돈 빌려서 냈는데 결국 그걸 접었지. 그리곤 친구 녀석들한테 집으로 다 모이라고 한 다음에 무작정 러시아로 가자고 했다.
다 같이 가자?
그렇지. 다 같이 가자. 가서 극장 같은데라고 가서 일하자.
친구 따라 간 거라고?
사실 심정적으로 다른 중요한 이유가 더 있었다. 러시아처럼 붕괴된 가치관 속에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게 궁금했다.
응?
그 때 러시아에선 사회주의가 무너졌거든.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예술은 사회와 인민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게 무너진 곳에서 예술은 어떤 고민을 할지 알고 싶었다. 나 역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예술을 해야 하는지 몹시 궁금해 하고 있었거든. 그걸 러시아에서 알아보면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들의 고민을 봤나?
그래서 러시아에 갔는데 재미있었던 건 문제가 없어졌더라는 거다.
응?
사람들이 이미 거기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지 않더란 거지. 그냥 그런 고민들이 그들에게 중요한 거라고 내가 넘겨짚고 있었다는 거다.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교과서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 이미 러시아는 그게 중요한 나라가 아닌 거다.
그럼 뭐가 중요하던가?
사람답게 열심히 멋지게 살자는 게 중요하더라.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주의는 교과서적이고 죽어 있는 거였다. 물론 정치하는 사람들이야 다르겠지만 예술 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집착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주의를 거치지 않은 우리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예술을 하고 있었다. 정말… 난 먼 나라에서 남 걱정이나 하고 있었던 거지.
!
그래서 러시아에서도 한동안 방황했다. 다시 열심히 선생님이 필요 없어질 때까지, 내 선생님을 마음에 담을 수 있을 때까지 헤맸다. 나한텐 선생님이 없었거든. 그러다 결국 선생님을 만났다. 그 분한테서 나를 배웠지. 그게 내 러시아 유학 생활이다. 방황했지만 안 갔으면 몰랐을 많은 것들은 알고 온 거지.
선생님을 찾았다고?
나를 찾아줄 선생님을 계속해서 찾았다. 러시아 애들하고 묻어 다니면서 선생님을 찾았고 결국 진짜로 만났다. 그래서 그 분이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지. 내 인생에서 러시아 생활은 몇 년 안 되는 기간이지만 너무 중요하다. 그 시간에서부터 지금의 내가 시작된 거니까.
추상적인 가치를 찾으려고 인생의 한 때를 소비하는 걸 요즘은 다들 너무 두려워한다.
그 시간 동안 취업 준비를 하던지 영어 공부를 해야 낙오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다들 남들이 정해놓은 길만 따라가려고 하는 거 같다. 이상하다. 어떻게 궁금한데 그걸 내팽게치고 온전히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냔 말이지.
내가 왜 연극을 해야 하나, 내가 왜 연기를 해야 하나, 내가 왜 세익스피어를 꼭 해야 하나를 알아야 하는 거지.
그렇게 궁금증이 쌓이고 쌓이고 그거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게 인생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당신이 어디에 있고 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 하는 사람인 거 같다. 자
신의 좌표가 어딘지 알아야 하고 그게 납득이 될 때까지 질문 하는 사람이 있다.
러시아에 갔던 건… 그 시절에 다들 고민했던 거창하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였던 거다. 사실 연기를 한다고는 했지만 대학교에서 아카데믹하게 공부만 하고 나와보니까 막상 내가 어디에서 뭘 해야 할지 혼돈에 휩싸였던 거지. 그걸 난 질문의 끝까지 가보는 걸로 돌파하려고 했던 거고. 사실 러시아에 가니까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더라.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한테 물었거든. 네가 왜 여기에 있냐. 뭘 배우고 싶냐.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한국사회에선 그러면 안 되거든.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하거든. 질문하거나 의문을 갖지 말고 열심히 앞으로 달려야 하지.
그러니까 어느 순간 그런 질문을 받아버리면 갑자기 회로가 엉키는 거다. 확 고꾸라져버리는 거지.
연기할 땐 어떤가. 어떤 작품을 선택할 때, 어떤 연기를 이렇게 할 때, 스스로에게 분명한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거지? 그래서 촬영 현장에서도 밤새워서라도 토론하고 또 토론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렇지. 그렇지. 그걸 설명할 수 없으면 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내가 그걸 모르는 데 그거 하면 안 된다. 보는 사람이 어떤 느낌을 갖는지 모르는데 그걸 하면 절대 안 된다...(다시 지나가던 사람 때문에 말이 끊긴다.)
다들 당신을 힐끔 거리지 않나?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된 거 아닌가.
이건 절대 편해질 수 없는 거다. 어떤 식으로든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닌 거 같다. 계속 싫지만 너무 계속 싫어만 하다 보면 인생이 싫어질 거 같으니까 빨리빨리 넘어 가는 것 뿐이다. 이젠 일상의 불편함 같은 게 됐다. 나한텐 버스 기다리는 데 안 오는 거 같은 불편함 같은 거다.
자기 연기에 대단히 분석적인 배우가 있다. 백윤식 선생 같은 경우만 해도 대본에 빼곡하게 메모를 해놓는데… <범죄의 재구성>때 본 적 없나?
그래? 정말? 몰랐다. 분석을 한다고? 자기 연기를? 대단하다. 난… 난 열나게 하고 만다.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난 다르게 하는 걸 모르겠다. 나도 연기를 할 때 걱정은 많이 한다. 몸 상태가 최상이어야 할 텐데… 나머지 상황도 받쳐줘야 할 텐데… 그런 걱정을 한다.
분석을 안 해도 되나? 그냥 그 인물이 돼버리면 된다는 거지?
야구에서 타자가 말이다 타석에 섰을 때 무슨 공이 들어올지 모르는 거 아닌가. 스트라이크가 들어올 수도 있고 볼이 들어올 수도 있다. 그럴 땐 그냥 긴장 풀고 나가서 마음껏 휘두를 뿐이다. 평소에 연습했던 그대로 볼에 집중하면서 팔에 힘을 빼고 그저 생각하는 건 단 하나다. 공 말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연기다.
자신이 갖고 있는 만큼 나오는 거 아닌가. 변신할 수도 없는 거고 말이지. 예전에 <킬리만자로>라는 영화를 한 적이 있지. 그 때 일간지 기사 제목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박신양, 킬라만자로에서 포효.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따온 거였지. 포효하면서 변신했단 게 내용이었다.
응? 그게 왜?
…아니… 그게 사람들은 연기의 정수는 모른다. 연기를 보지만 연기가 무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배우라면 삼단 변신이 가능할 거라고 여기는 거지. 하지만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걸 가진 만큼 보여줄 뿐이다. <눈부신 날에>의 날건달 우종대도, <파리의 연인>의 한기주도 결국 당신인 거다.
흠… 결국 나하고 그 인물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묻는 건가?
그.. 그렇지. 결국 쉬운 질문을 어렵게 했다.
그렇다면 별로 안 비슷하다. 내 안에서 꺼내긴 하지만 닮았다고 할 수 없지. 난 나일 뿐이거든. 그냥 연기를 열심히 했을 뿐이다. 아니지… 이런 대답, 재미없네. 이렇게 얘기할까? 그럼요. 나하고 아주 비슷해요. 한기주와 닮았죠.
재밌네.
다들 이 말을 원하는 거겠지?
당신은 오랜 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오갔다. 영화와 드라마, 우열이 있을까?
5년 전… 아니 그 전만 해도 영화배우가 드라마를 한다는 걸 무척 금기시했다. 이젠, 그런 게 없어지는 거 같다. 드라마가 할 수 있는 것과 영화가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거든. <파리의 연인> 같은 건 영화로는 못 만든다. 돈도 너무 많이 들어. 빠른 템포 속에서 나오는 박진감과 때로 나오는 여유로운 느낌, 그런 거 영화는 절대 못 준다. 영화는 너무 무겁다. 영화와 드라마의 장르적 우열은 없다. 그런데 참 많이들 착각하고 있다.
많이들?
많이들. 꼭 그런 건 아닌데 말이다.
영화를 한다고 해서 예술을 하는 건가?
절대 아니지. 그런 생각은 빨리 끝나야 한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는 감독들이 많지 않나.
예전에 대학교에서 방송국 시험 보면 혼났다면서.
그게 연극을 한다는 정서적인 우월감이지. 그게 시대적인 현상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바뀌어야 했고 바뀌었잖아. 영화하는 우월감도 빨리 끝나야 한다. 스필버그나 제리 브룩하이머 같은 사람들도 영화와 드라마를 오간다.
영화 순혈주의 같은 게 있지. 영화를 오랜 동안 공들여서 찍고 드라마는 후딱 찍는다. 뭐 그런 거지.
거 참… 할 말 없다. 노코멘트.
왜? 말해야지 녹음이 되지.
음.. 하고픈 말이 없다.
어쨌든 <눈부신 날에>의 우종대는 꽤나 인간적이더라. 다른 건 몰라도 양아치 같던 인간이 한 아이를 만나서 인간답게 변하는 그 감성은 분명 느껴졌다. 박신양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라 할까.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거면 됐다. 정말 다행이다. 적어도 그 감정선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건 누가 뭐래도 배우의 몫이니까.
그런데… 그게 실제 박신양도 네살 배기 아이의 아빠가 됐기 때문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처럼 배우를 둘러싼 현실의 변화가 연기에도 영향을 미칠까.
흠…
말을 해야 녹음이 되지.
글쎄… 물론 애기에 대한 감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도움이 됐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지.
그렇다면 배우가 나이 먹거나 결혼하거나 부모가 된 다음 달라지는 게 있을 거라는 건 또다시 연기 문외한들의 착각인건가?
이런 건 있지. 촬영장에서 여유가 생기지. 야구 초년병 때는 그저 치고 나가야지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느긋해지거든. 자, 즐겁게 놀다가 이번에 한방 때리자 이렇게 된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느낌이 달라질 수도 있지.
우리 같은 대중은 당신들이 나이 먹는 걸 보면서 함께 늙어 간다. 전도연이라는 배우가 결혼을 했다. 우린 그녀가 처음 데뷔하던 시절의 모습부터 결혼식장에 선 모습까지를 다 보면서 그녀가 보여주는 연기도 본다. 그녀의 연기가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와 함께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목격하는 거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다.
…
말씀을 하셔야 녹음을…
…
뭐… 어쨌든 결혼하니까 좋지?
좋지.
흥. 뭐가 좋나? 아침도 못 먹고 다닌다면서.
나 원래 빵 먹는다. 왜 사람을 몰아부치고 그러나?
예전에, 평생 천편은 할 거라고 했었다.
그 정도는 잡아야지. 그 정도는 잡아야 중간에 지치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할 거 아닌가.
지금도 천편이 목표인가?
글쎄 지금은… 백편?
설마.. 주연작만?
지나가는 사람으로 나온 것까지 다 합하려고.
신기주 PREMIERE KOREA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pshinyang&no=6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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