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잘 생긴 얼굴은 아니다. 그렇다고 흥행 메이커도 아니다. 하지만 주위로부터 꽤 두둑한 신뢰를 받고 있다. 약간의 어눌함과, 때론 부담스럽기도 한 진지함과, 순진한 장난기가 그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프리미어 / 러시아에서 연극을 공부했던 얘기부터 하죠.
박신양 /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86 학번으로 입학을 했고 남들처럼 대학원 시험도 봤죠. 그런데 동기들이 전부 낙방을 하고 혼자만 합격을 한 겁니다. 사실 대학원에서 배울 것은 대학에서 이미 배웠다고 생각했고, 무대를 찾아 어디든 떠나고 싶었어요. 마침 러시아 국립 말리극장 소속 쉐프킨 연극대학이 자매학교여서 쉽게 떠났죠. 1992년에 러시아로 건너가 고전적이고 보수적인 쉐프킨 연극대학에서 1년,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슈킨 연극대학에서 2년 동안 연극을 공부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러시아였습니까?
왜 하필이면이라는 제약이 오히려 이유가 되었습니다. ‘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러시아냐, 공부하고 귀국하면 학위는 보장되냐’고 모두들 말렸죠. 하지만 기대감, 긴장감, 호기심 등이 나를 끌어당겼습니다. 무너져가는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연극인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도 궁금했구요. 그 선택이 일반적인, 대중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을 것이다, 책에서 보아온 그런 편협된 체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떠났어요. 예상이 맞더군요. 체제의 이름만 달랐을 뿐이에요. 오히려 우리보다 더 체계적이고 자율적이었어요.
#국내에서의 공부와 어떻게 달랐습니까?
교육 방식이 말보다는 움직임 위주였기 때문에 언어 문제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어요. 표현의 1차 수단이 몸이었죠. 특히 국립 슈킨 연극대학에서의 공부가 좋았어요. 러시아의 연기자 지망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대학이죠. 마치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차근차근 다독거리고 흥미를 유발시키고 자유롭게 만들어주었죠. 시를 읽고 노래를 하고 발레를 하면서 연극을 몸에 익히는 식이었어요.
#양윤호 감독의 연락을 받고 돌아왔다면서요.
잠깐 귀국했을 때 양윤호 감독에게서 박상륭 씨의 ‘죽음의 한 연구’를 선물받았어요. 충격이었죠 (갑자기 눈이 커지며 흥분한다). 30년 동안의 생각을 마무리 짓고 동의할 수 있는 그런 책이었죠. 얼마나 치열하게 답을 구해낼 수 있는가, 얼마나 원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전형을 보여주는 책이었어요. 전생, 영혼 등에 대한 나름대로의 재해석이 담겨 있었고, 불교와 기독교의 일치 가능성이 담겨 있었고, 예술적 감각, 형식의 묘미, 주제의 일관성 등 모든 것이 담겨 있었어요.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했죠-누가, 언제, 어떻게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 수 있을까. 1년 내내 책을 끼고 다녔어요. 그러던 차에 양윤호 감독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유리 를 만들자구요. 만일 누가 옆에 있었다면 (갑자기 연극 무대처럼 손을 벌리고 반쯤 일어서서) 어? 어? 어? 야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러시아 친구들 때문에 쉽게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공부를 그만두고 떠나야 하는데 그 이유를 누구에게도 설명할 자신이 없었어요.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죠. 인민예술가인 담임 선생님 유리는 ‘학비 때문이냐? 그렇다면 내 수업만이라도 들어라. 너는 우리의 식구가 아니냐’고 하셨죠. 동료들은 동료들대로 학교에 연판장을 돌렸어요. ‘보조금을 안받겠다, 신양은 작업상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내용으로요.
#양윤호 감독하고는 <가변차선>에서 만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학생 때 만든, 일용노동자들의 일상을 담고 있는 영화였어요. 자신들의 인생에도 과연 가변차선이 있을까를 궁금해 하는 일용노동자들이요.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두 달을 준비했고 한 달 동안 찍었어요. 준비기간엔 계속 리허설을 했죠. 대화를 해가면서 인물을 만들고, 씬을 만들고, 카메라 포지션까지 설정했죠. 이미 무대에서 연습까지 했기 때문에 현장에서도 일관성이 있었고, 당황하지 않으면서 촬영에 임할 수 있었어요. 돌이켜 보면 부끄럽지만 의미있는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일반적으로 < 유리 >가 데뷔작인 줄 알지만 그 전에 한 작품 더했죠?
어떻게 아셨어요? <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 >에 아주 잠깐 나왔는데. 양윤호 감독이 그 영화 조감독이었어요. 1994년 잠깐 들어왔다가 출국하기 전날이었는데 연락이 왔어요. 최진실 씨가 만나는 출판사 직원 역이 급히 필요하다면서요. 당시엔 배우를 할지 안할지도 생각 안했던 시기였는데 얼떨결에 출연했죠.
1995년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발표가 있자 영화계 일각에서는 콧방귀를 뀌면서도 내심 기대를 걸었다. 읽기에도 까다로운 소설을 신인 감독이 영화로 만든다는 소식에 “그게 과연 영화가 되겠어?”와 “그래, 열심히 해봐. 그런 패기도 있어야지”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더 심하게 얘기해보면, “그래 만들어만 봐, 나도 박상륭의 소설을 읽었는데, 아주 난도질을 해주겠어”와 “기대는 하겠는데, 학예회 수준이 될 걸”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개봉이 되었을 때, 불교계의 과민한 반응과 칸느의 초청과 공윤의 칼질과 평단의 혹평과 호평의 엇갈림 속에서도 “박신양? 좀 다듬으면 물건 되겠던데”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영화로 만들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죠?
이런저런 메시지를 많이 주는 책이지만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어요. ‘우리 앞만 보고 가지 말고 뒤도 보고 남도 보며 살자. 우리는 같은 별의 작은 여행자들이다’라구요. 사람들로 하여금 양보하게도 만들고, 침착하게도 만들고, 스치는 인연들을 소중하게도 만드는 그런 영화였어요.
#< 유리 >는 소중한 인연이었나요?
물론입니다. 만일 양윤호 감독이 < 유리 >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고민하고 있을 겁니다. 어떻게 만들까를 말이죠.
#양윤호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 가변차선 > 시스템의 연장이었어요. 양 감독하고 나는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었죠. 자존심을 버리고 감독과 배우로서 작품에 대해 분석하고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더없이 좋은 관계였어요. 매 장면에 토론의 결과를 더하고 보태고 했죠. 작품의 본질에 대한 서로의 믿음이 결여된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부담도 컸어요. 스탭들은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장편 상업 영화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초보자였죠. 그러나 믿음은 있었습니다. 다 알아야 완벽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흥행 센스가 있고 충무로 시스템을 따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열심히 하자.
#평단이나 관객들의 반응에 불만은 없습니까?
불교계에서 너무나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에 좀 실망스러웠어요. 실수가 있을 수 있는 젊은이들의 작업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을 너무 여유없게 반응한 것같아요. 수도를 하는 어른들이니까 그럴수록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영화 자체보다 곁가지 반응들이 너무 심해 양윤호 감독이 많이 아파했어요.
#< 쁘아종 >을 끝낸 지금, 데뷔작을 돌이켜본다면요?
아직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작품이라서 뭐라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냉정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어요. 조금 더 있어 봐야죠.
#< 쁘아종 >은 또 어떤 인연이었나요?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고, 최선의 시나리오가 그것이었기 때문이에요. 에로 부분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사회를 부정하는 인물의 캐릭터에서 가능성을 보았죠. 한국에 1년 동안 있으면서 절실하게 느낀 점이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보하려들지 않는다’였어요. 온통 바쁜 사람들뿐이었죠. 조금만 양보하고 순수해지면 매장되고 바보가 되는 것이 우리 현실이죠. 그런 것에 대한 나의 불만을 영화를 통해 이미지로 남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과가 만족스럽던가요?
함정은 결국 에로였어요. 많은 부분이 내 생각과 일치하지 않았죠. 주제와 연기가 일치되는 영화가 되기를 바랐는데…. 어쨌든 박재호 감독님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제와 자신의 연기가 일치하는 작품이라…. 다음 작품 고르기가 어렵겠습니다.
말에 책임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작품 고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아요. 사실 나도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잊어버리려 노력도 하죠. 일관성도 중요하지만 잊는 것도 필요해요. 말에 책임지는 것이 무덤을 자초하는 꼴이 되는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제부터 막 할 거예요. 정리는 더 늙었을 때 하죠 뭐.
#한국 영화의 탈출구를 생각해 봤습니까?
< 사랑하고 싶은 여자… >에 잠깐 출연했을 때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제작 환경이 참 열악하구나, 영화 만들기가 쉬운 것이 아니구나’라구요. 3개월의 연습기간이 탈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최소한 1개월만이라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분위기만 조성되어도 많은 부분 달라질 것입니다.
#드라마 < 사랑한다면 >을 제외하곤 모두 동국대학교 동창생들(양윤호, 박재호, 김혜수)과 함께 해서 분위기가 좋았겠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데뷔작은 주요 스탭과 연기자들이 전부 동문이었고, 박재호 감독님도 선배구요. 하지만 재학 시절 ‘선배들이 끌어주잖어’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었어요. 학연이 이해관계를 만드는 것이 정말 싫었죠. 그런 관계들은 끊고 순수하게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했고 그게 오히려 인간적인 뿌리를 만들어준 것 같아요. 그들은 날 행복하게 해주죠.
#< 유리 > 이후에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에 출연한 건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매체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지름길이 텔레비전이라고 생각했죠. 마침 혜수의 소개로 < 사과꽃 향기 >의 장 PD를 만났어요. 30분 만에 이런 사람이면 믿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 연락드리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엉뚱함이 인상깊었다고 하시더군요.
#< 사랑한다면 >은 어땠나요?
30퍼센트 정도 진행이 되고서야 믿음을 가질 수 있었고 이관희 PD와 많은 토론을 했어요. 나를 자유롭게 놔주고, 표현방식을 인정해주셨죠. 만약에 뜯어말렸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하고 싶은 대로 해 봐라’고 하니 힘이 나더군요. 일화를 하나 들어보죠. 심은하 씨가 낙태했다고 고백하는 씬이 있었어요. 콘티를 보니 밋밋하더군요. 움직일 수가 없게 되어있어서 그렇게 하면 꼭 죽어버릴 것같더라구요. 그래서 건의를 했죠. ‘바꿉시다. 침대에 내동댕이치고 내가 장롱에 머리를 부딪히는 걸로 바꿉시다.’ 결국 카메라 위치를 바꾸고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모두들 웃었죠. 텔레비전에 어울리지 않는 연기였죠. 하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 정열적인 연기는 자칫 오버 액션으로 보여 오히려 시청자들을 거북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안한 것은 아니에요. 결국 균형 감각인데, 러시아의 유리 선생님도 이런 얘기를 하셨죠. ‘조금 넘치면 거북하고, 조금 부족하면 미흡한 것이 연기다’라구요. 수치로 얘기할 부분은 아니지만요.
#드라마가 편합니까? 영화가 편합니까?
둘 다 불편해요(웃음). 각각 장점이 따로 있는 것이죠. 영화가 좋지만 그 본질이 훌륭한 것이지 매체가 우월한 것은 아니고, 텔레비전도 병폐가 있다지만 나름대로 표현 방식에 가능성도 있구요. 굳이 구분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럼 어느 쪽의 연기가 더 낫다는 얘기는 들어봤나요?
영화 쪽이라는 얘기가 더 많아요. 나도 영화를 하고 싶구요. 하지만 < 사랑한다면 >보다 못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라면 절대 안할 겁니다. 영화 신봉자는 결코 아니거든요.
#연기에서 열정은 느낄 수 있으나 뭔가 미진함이 남습니다. 그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답답함이 느껴진다는 뜻입니까?
#열정이 제대로 무르익지 못한 채 불거져 나오는 것같습니다.
비슷한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아 배우들에게서도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그 자리에서 확 풀어져 후련함과 함께 흥겨워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생각을 하게 만들죠. < 노스텔지아 >에 출연했던 야니코프스키의 연극을 6번이나 봤는데 특히 그랬어요. 후련할 때도 있었는데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죠.
#연기자로서 자신의 장점과 약점을 든다면요?
없어요. 그저 내 자신만의 연기를 할 뿐이죠. 어떤 사람이 부당한 평가와 합당한 평가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내 연기도 그럴 겁니다. 틀리다고 해서 반론할 생각도 없고, 좋다고 해서 들뜰 일도 아니죠.
어눌한 것같으면서도 나름대로 정답 카드를 가지고 있어 질문마다 그 카드를 내놓고 있는 것같다. 좀더 자유로운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행복하다고 되풀이하던 박신양은 혼잣말로, 캬! 내가 오늘 왜 이렇게 말을 잘하지? 하면서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 기자는 최대한으로 ‘힘’을 뺀 박신양을 찍고자 했다.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 모습이 영화에서보다 드라마에서보다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바로 이것이 박신양의 참모습인 것을
[출처]불분명 (2차 출처 박신양갤 쏘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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