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 '검은 집'의 배우 황정민과 자연인 황정민
[이동진닷컴] 배우로서 황정민은 쾌락주의자인지도 모른다. 그의 연기는 자신의 일을 만끽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결과물이니까. 그는 즐거워서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창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확실한 예다.
‘YMCA 야구단’의 소심한 광태, ‘너는 내 운명’의 우직한 석중, ‘로드 무비’의 격정적인 대식,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털털한 두철, ‘바람난 가족’의 이중적인 영작, ‘사생결단’의 거친 도경장… 출연작들을 통해서 본 배우 황정민의 실체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배우 황정민에게선 자연인 황정민을 찾기 힘들다. 배우 황정민은 자연인 황정민의 특성을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가 맡은 배역은 죄책감과 인간애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인물. 신작 ‘검은 집’(6월21일 개봉)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사이코패스의 가공할만한 범죄에 말려들며 끔찍한 일을 경험하는 보험회사 직원 준오를 연기한다.
서울 평창동의 한 와인바에서 황정민을 만났다. 편안하고 따뜻한 인터뷰였다. 캐묻고 싶은 마음 따윈 금세 없어졌다. 처음 인터뷰를 하는 것인데도 격의 없는 황정민은 어떤 대화를 해도 마음의 커튼을 열고 창문까지 밀어젖힌 채 이야기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우 황정민은 13편의 장편 영화를 내놓고도 정체를 노출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담백하고 심플한 자연인 황정민은 짧은 만남에도 흡사 실체가 손에 쥐어지는 듯한 느낌(혹은 착각)을 주는 사람이었다.
몇몇 질문에 대해서 그는 무척이나 쿨한 답변을 들려줬다. 쿨하다기보다는 무심하다는 쪽에 가까운 대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이야기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자니, 뛰어난 배우란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에너지를 한 곳에 몰아서 쓰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마도 주변에서 수십번은 받으셨을 것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신작 ‘검은 집’ 출연이 의외의 선택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인데요, 마이너 장르 취급을 받는 스릴러-공포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글쎄, 다들 의외의 선택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왜 그럴까요. 어쩌면 그런 통념이 싫어서 더 출연을 고집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좀 알려진 배우가 공포 영화에 출연하면 보통 이상하게들 생각하시잖아요. 뒤집어 보면 그간 충무로가 공포물을 여름 기획 상품처럼 만들어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거예요. 저 자신 극장에서 돈 내고 볼 때 속이 상하는 우리 공포영화가 많았구요. 그래서 제가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이걸 선택하게 된 또 한 가지 이유는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이 시나리오가 되어 제게 들어오자 운명처럼 느껴졌다는 거죠. 작년 10월에 대본을 받았는데, 정말 이럴 수도 있구나, 싶더라구요. 저는 영화 일을 하면서 인연이라는 걸 중요시하는 사람인데, 이게 인연이라면, 뭐, 제대로 받아들여야죠.(웃음)”
-일본 작가 기시 유스케의 원작 소설을 우연히 손에 넣고 하루만에 다 읽으셨다죠?
"1년 반쯤 전인데,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그 소설을 발견했어요. 저는 책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을 사는 것도 좋아합니다. 국사 선생님인 외삼촌이 책을 무척 좋아하셨던 분이셨어요. 어릴 때 외삼촌 방에 들어가 보면 책이 꽉 차 있는데, 책상으로 쓰는 작은 밥상에까지 쌓인 책들이 정말 인상적이었거든요.”
-역시 ‘밥상’은 감동적인 것이로군요.(웃음)
"그런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서 책을 좋아하게 됐어요. 요즘도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서점에 자주 갑니다. 그 날은 늘 찾던 분야만 들르는 게 싫증이 나서 우연히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그 소설을 손에 넣게 된 거죠. 그냥 잠시 서서 들춰 보려고 했는데 결국 책값을 치르고 하루에 다 보게 됐어요.”
-책은 어디서 주로 사세요?
"교보문고에 갑니다.
-교보에 가면 사인해달라는 분들이 많지 않나요?
"해드리면 되지요,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웃음)”
-주로 어떤 책을 사세요? 최근 읽으신 책 중에서 좋으셨던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수필집을 자주 삽니다. 현대문학상이나 이상문학상 작품집 같은 것도 즐겨 사죠. 미술에 대한 책도 좋아해요. 최근에 본 책 중에서는 소설 ‘향수’가 좋았어요. 클림트 전기도 괜찮았구요.”
-‘검은 집’은 사실 감독님이 그리 알려진 분이 아니죠. 함께 주연한 유선씨도 톱스타는 아니구요.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상업적 무게는 온통 황정민씨가 지고 있는 게 사실일 겁니다. 관객들 대부분이 황정민이라는 이름을 보고 올텐데, 그런 점이 부담스럽진 않으세요?
"특별히 부담스럽진 않아요. 작업할 때는 부담이 있었는데 완성 후에 아무 생각이 없는 것같아요. 결과가 어떻든,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고 만들어진 상황이니까요. 화살이 오면 오는 대로, 찬사가 오면 오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여야죠. 저는 늘 그런데, 다 마치고 나면 아쉬운 게 없어요. 아쉬웠으면 아예 안 했던가, 아쉽지 않도록 할 때 잘 하던가, 둘 중 하나죠. 진짜 좋았다면 그만큼 되는 것이고 그게 안 되었다면 제 능력 밖인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뻔뻔스럽게 내 연기가 만족스럽다는 건 아닙니다. 이번 일을 다음에 더 잘 할 수 있는 발판으로 삼고 싶다는 거죠.”
-일반적으로 배우들은 쉽게 잊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연기를 끝내고도 미련이 많이 남는 것 같더라구요. 그런 상황에 비하면 황정민씨는 상당히 쿨한 배우인 것 같습니다.
"일의 측면에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검은 집’을 보면서 관객들이 다 똑같이 느끼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 밖에 없잖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선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죠.”
-‘검은 집’의 주인공 준오는 수동적인 인물입니다. 극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의 한 가운데서 그저 내내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죠. 배우들은 이렇게 수동적인 캐릭터를 덜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애초에 조금 고민했어요. 이런 캐릭터는 연기를 잘 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을 먹는 배역이니까요. 그래서 참 연기하기 힘들어요. 밋밋하기 쉽구요. 사실 ‘사생결단’처럼 강렬하게 드러내는 연기가 어찌 보면 더 쉬울 수도 있어요. 연기를 하면서도 가장 힘들었던 게 이 영화를 볼 관객들과 같이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 혼자 앞서서 달리거나 느려 터져서 한참 뒤쳐져 가는 건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는 거죠.”
-‘검은 집’에서 황정민씨의 연기는 결국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의 연기입니다. 배우가 상황을 주도해가는 연기가 아니라, 그 캐릭터에 다른 캐릭터가 어떤 충격을 가해오거나 끔찍한 일이 발생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스타일의 연기니까요. 그런데 공포영화의 성격상 극중에서 몸서리를 치거나 놀라는 상황이 몇 번이고 계속 발생하기에, 그 모든 끔찍한 순간마다 조금씩 다른 연기를 해내야 하는 게 정말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놀라는 연기도 다 달라야 하니까요. 한 작품에서의 연기 농도를 그래프로 그릴 때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100이 되어야 한다면, 전체적으로 점점 더 감정을 키워나가서 한 번만 하면 되죠. 그런데 이 영화는 준오가 매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이 전부 다 100이니 그래프의 궤적이 거의 일직선일 수 밖에 없잖아요. 처음엔 그렇다 해도 끝까지 그럴 수는 없겠죠. 그래서 제가 생각한 부분이, 좀 테크닉적이긴 하지만, 호흡에 관한 것부터 시작해서 어떤 부분은 내지르고 어떤 부분은 들여마시기도 하면서 변화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는 연기를 모니터로 계속 확인하면서 파악도 하구요. 제일 중요한 것은 매 순간에 제가 느끼는 제 가슴 속의 감정이죠. 그게 진짜로 서늘한지 아닌지가 핵심인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니까요. 그 부분에서 저와 가장 많이 싸웠다고 할 수 있겠죠.”
-멜로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연기할 때, 좋은 배우들은 정말 사랑에 빠져 슬퍼하는 것 같습니다. 코미디에서 웃기는 장면을 연기할 때는 진짜 재미가 있어서 즐거워하는 것 같구요. 그런데 공포라는 감정은 좀 달라 보입니다. 지어진 세트라는 것을 뻔히 알고, 또 공포의 실체도 시나리오를 통해서 다 아는 상황에서, 연기하는 배우가 실제로 공포를 느끼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공포는 사실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배가되는 감정이잖습니까.
"정말 어려워요. 그래서 더욱 공포스런 감정을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흔히 느낄 수 있죠. 주변에서도 흔하게 보고 듣고 또 직접 저도 경험했으니까요. 그런데 공포라는 것은 사람들이 최대한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감정이잖아요. 그래서 배우로서 더 쉽지 않아요. 저는 그래서 이 영화를 찍는 도중에 상대 배우를 거의 안 봤어요. 식사까지 따로 했다니까요.”
-그렇게 ‘검은 집’을 찍으면서, 정말 공포심을 느꼈습니까. 공포심을 연기한다는 것과 공포스러워 한다는 것은 좀 다를 텐데요.
"솔직히 말하면, 반반입니다. 절반은 느낀대로였고 절반은 테크닉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거, 이런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같은데요.(웃음) 어쨌든 저로선 대단히 흥미로운 공부였습니다.”
-이 영화는 사이코패스(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해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고 난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개인적 견해는 어떤 겁니까?
"저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 ‘저게 인간이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병이고, 그 사람들이 그런 병을 타고 태어났다는 걸 알고 나니까 연민이 생기더군요. 그 사람들이 그런 병을 앓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 연민과 함께 또 생각이 드는 것이, 예전에는 이런 병이 거의 없었을텐데 왜 갑자기 현대에 등장했을까 하는 거죠. 원작 소설이 나온 것도 그런 사회적인 맥락이 있었을 테구요. 그렇다면 진짜 사회가 무섭게 변하고 있는 거구나, 싶어서 안타까웠어요.”
-이 영화 속에서 사이코패스를 보는 입장은 두가지입니다. 준오처럼 그들도 인간이니 같이 보듬고 살아가야 한다는 견해, 그리고 준오의 직장 상사나 형사처럼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거나 괴물이니 격리해야 하는 게 최선이라는 견해지요. 그런데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와 결말은 아무래도 후자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원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 이 영화를 놓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우리가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사이코패스들과 이렇게 알게 모르게 얽힌 채 살아가고 있는 관계가 얼마나 섬뜩하냐, 그런 게 현실이잖냐, 라고들 말했어요. 그래서 제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실제 사이코패스 사건에 대한 보도 내용들을 깔면서 끝내자고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죠.”
-이 영화에서 준오가 끔찍한 일을 겪는 것은 타인의 처지에 동정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이코패스와 얽혀 살고 있는 상황에서, 동정심을 안 보이고 냉정하게 지나치는 게 최선인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아니예요. 그런데, 이 영화를 찍기 전에 자료들을 살펴봤는데, 그게 전부 다 외국 것들이더라구요. 우리의 경우 이 분야에 대해서 연구된 게 거의 없었습니다. 정신질환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백안시하는 풍토 때문인 것도 같구요. 정말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스타야말로 사이코패스를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광적인 팬에게 살해된 스타들이 존 레넌 외에도 꽤 많으니까요. ‘검은 집’을 찍으신 분으로서, 실제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웃음)
"실제로 만난다면, 백만 퍼센트 피하죠.(웃음) 그런데 극중의 준오만큼은 그렇게 사이코패스에 손을 뻗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에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면서 20년 넘게 살아왔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좀 이상한 팬은 없으셨어요?
"없었어요, 다행히.”
-유부남이셔서 그런가 봅니다.(웃음)
“아, 그러면 천만다행이죠.(웃음)”
-지하실 장면이나 옥상 장면을 찍을 때 가장 힘드셨죠? 보는 사람에겐 지하실 장면이 더 끔찍해 보이던데, 실제론 어느 장면이 더 힘드셨어요?
“저도 지하실 장면입니다. 진짜 힘들게 찍었어요. 더위 때문에 인공 피가 상해서 냄새가 심하게 나는 데다가, 그게 또 페인트 냄새와 섞여서 견디기 힘들더군요. 먼지는 먼지대로 또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이건 제 자신의 문제였는데, 자꾸 황정민과 전준오 사이에서 생각이 엇갈려서 좀 혼란스럽기도 했죠. 사실 영화가 크랭크 인 한 뒤에 그 정도 시간이 흐르면 캐릭터만 생각하게 되는데, 그 장면에서 왜 전준오가 아닌 황정민이 마음 속에서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더라구요. 준오 아닌 황정민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다르게 행동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제 의문을 어떻게 다독였냐하면, 극단적인 공포심을 느끼게 되면 상대가 설혹 아이라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였어요. 버지니아 공대 조승희 사건 때도 사실 권총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가 없거든요. 제가 군대에서 기갑병으로 근무하면서 권총을 쏴봐서 아는데, 권총으론 잘 안 맞아요. 그런데 그 수많은 현장의 남자들이 범인 한 명에게 제대로 항거도 못하고 죽어 갔다는 건 사람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공포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그 장면에서의 준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죠.”
-찢겨진 채 공중에 매달린 누군가의 다리에 부딪친 뒤,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면서 진저리를 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천장에 매달린 다리를 보고 놀란다고 시나리오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연기할까 고민하다가 그런 아이디어를 냈던 것 같아요. 지하실 장면은 한 번에 열다섯 시간씩, 모두 열흘을 찍었어요.”
-‘너는 내 운명’에서 전도연씨와 각별한 앙상블을 보이셨는데, 이번 ‘밀양’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는 걸 보니 어떻던가요.
“너무 좋았죠. 만나서 직접 축하도 했는데, 사실 배우들끼린 그런 이야기 하기가 좀 쑥스러워요. 너무 잘 한 걸 뻔히 다 아니까요. 도연이가 ‘밀양’을 찍으면서 너무 힘들다고 하길래, 제가 ‘잘 할 거면서 왜 그래?’라고 가볍게 면박을 줬죠. 역시나, 미친듯이 잘 했잖아요.(웃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런데 ‘밀양’ 보면서 강호 형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저걸 저렇게 연기하네, 내가 했으면 저렇게 안 됐을텐데’ 싶더라구요.”
-‘한국의 배우’를 주제로 한국 영화사상 배우의 연기가 가장 뛰어난 100편의 영화를 골라 타임 캡슐에 넣어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워낙 의미가 큰 일이라서, 바로 배우가 직접 선정하기로 방침이 정해졌어요. 이렇게 해서 황정민씨에게 내일까지 두 편의 출연작을 골라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만일 이런 상황이 온다고 가정하면, 지금까지 출연하신 13편 중 어떤 영화를 추천하시겠습니까.
“두 편이라고 하셨죠? 흠. ‘바람난 가족’과 ‘너는 내 운명’을 선택하겠습니다.”
-하필 그 타임 캡슐에는 배우가 직접 말하는 선택의 이유까지 같이 넣어둔다고 하네요.(웃음)
“ ‘너는 내 운명’은 그 영화를 통해서 배우 황정민이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작품으로 상도 참 많이 받았구요. 제가 연기를 하면서 늘 진심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런 진심이 관객과 제대로 소통해서 너무나 기분이 좋은 영화였어요. 영화라는 게 상업적이고 테크닉적인 면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사람이 만든다고 생각하거든요. 카메라라는 기계가 찍더라도 작동은 인간이 하는 거잖아요. 영화에서 모든 관계는 전부 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너는 내 운명’에서 그게 딱 맞아 떨어졌다는 의미가 큽니다. ‘바람난 가족’은 제가 그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 ‘황정민이라는 배우가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가장 크게 들었던 경우였지요. 차라리 ‘너는 내 운명’ 같은 영화는 저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람난 가족’의 영작처럼 쿨한 듯 냉정하면서도 아주 묘한 캐릭터는 잘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거든요. 제 주변에도 없고 제 자신 너무나 싫어하는 인간형이었으니까요. 그게 연기를 하면서 늘 부담스러웠어요. 그래서 촬영 중에 만들어진 것을 항상 보고 싶었는데, 완성본을 보면서 스스로 내 자신에게 어느 정도 만족을 하게 되더라구요. ‘아, 나도 저렇게도 할 수 있네’ 싶어서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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